양향자, 고졸 연구보조원에서 반도체 상무까지...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입지전적 여정

2025. 4. 19. 14:00정치

양향자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입니다. 광주여상을 졸업하고 1985년 삼성전자 기흥연구소에 입사해 단순 연구보조원에서 시작해 상무까지 올라간 그녀의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감동적입니다. 처음엔 '미스 양'이라고 불리며 커피 타기, 회로도 베끼기 같은 단순 업무를 했던 여성이 어떻게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주요 인물이 되었을까요? 오늘은 양향자의 성공 스토리를 통해 열정과 도전이 가진 힘에 대해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양향자, 고졸 연구보조원에서 반도체 상무까지...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입지전적 여정
양향자, 고졸 연구보조원에서 반도체 상무까지...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입지전적 여정

아무도 가능성을 믿지 않았던 시작

'미스 양'에서 '양향자 씨'로 불리기까지

1985년 11월, 광주여상을 졸업한 양향자는 삼성전자 기흥연구소에 입사했습니다. 당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주산, 부기, 타자뿐이었습니다. 고졸 여성 연구보조원이었던 그녀는 처음엔 커피 타기, 청소하기, 복사하기, 회로도 베끼기 같은 단순 업무만 맡았죠^5.

"연구원 보조로 시작했잖아요. 카피에서부터 회로가 만들어지는데, 도면으로 드로잉하는 굉장히 단순한 업무를 시작했었죠."

그녀에게 주어진 업무에는 성장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직원들은 그녀를 '미스 양'이라고만 불렀습니다. 하지만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죠.

어느 날, 부서장이었던 임형규 책임연구원이 악필로 휘갈겨 쓴 메모를 "누가 이것 좀 정리해 봐라!"라고 책상에 던져놓고 나갔습니다. 양향자에게 시킨 일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6.

"삼성전자에 입사해서 연구원 보조, 그러니까 커피 타고, 서류 복사하고, 손님 안내해주는 일을 했다. 그런데 당시 임 차장님이 필기체로 써놓은 영문 편지를 미국에 보낼 일이 있었다"

전문용어로 가득한 메모를 해독하기 위해 그녀는 선배들에게 물어가며 서식에 맞게 정리했습니다. 결과물을 본 임형규 책임은 깜짝 놀라며 "미스 양! 물건이네! 잘 했어!"라고 칭찬했습니다. 이것이 그녀가 입사 후 처음으로 이름을 불리며 받은 칭찬이었습니다.

ChatGPT 이미지 양향자 대선후보
ChatGPT 이미지 양향자 대선후보

일본어 공부로 길을 열다

당시 삼성전자는 반도체 기술을 일본에서 배우던 시기였습니다. 양향자는 연구원들이 일본어 논문을 읽는 것을 보며 '일본어를 알아야 기술을 익힐 수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5.

하지만 '고졸'이라는 이유로 사내 일본어 강좌 수강신청은 계속 거절당했습니다. "전례가 없어서 안 된다"는 답변을 여러 번 들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신청했고, 결국 강의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18세 말단 직원은 겁도 없이 사내(社內) 일본어 학습반에 들어갔다. '고졸인 네가 공부를 할 수 있겠느냐'는 강사의 비아냥거림과 대졸 연구원들의 텃세를 견뎌가며 매일 3시간씩 공부했다."^5

그녀는 주말에도 기숙사에서 나오지 않고 공부했고, 불과 3개월 만에 반에서 제일 먼저 일본어 자격증을 땄습니다. 이렇게 얻은 지식으로 그녀는 복사한 자료 밑에 0.5mm 볼펜으로 일본어 번역을 달아 연구원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양향자 씨'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ChatGPT 이미지 양향자 대선후보
ChatGPT 이미지 양향자 대선후보

장벽을 넘은 끝없는 도전

연구원의 꿈을 이루다

연구보조원 출신이 연구원이 되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임형규 책임은 양향자에게 특별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앞으로 미스 양도 회의에 들어와라, 잘 몰라도 그냥 들어봐."

그녀는 처음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거의 없었지만, 팀 회의 참석과 일본어 서적 번역을 통해 기술력을 쌓아갔습니다. 그 결과 그녀도 반도체 설계 업무를 맡을 수 있게 되었죠.

당시 임원 비서 자리가 비었을 때, 회사에서는 일본어 자격증이 있는 양향자를 그 자리에 앉히려 했습니다. 그러나 임형규 책임은 "니는 저 자리에 안 맞다"며 한마디로 막아섰습니다. 기술 연구원으로 성장해야 할 사람이 비서로 가면 커리어가 제한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6.

덕분에 그녀는 개발팀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임형규 책임연구원과 함께 CCD 반도체 소자 국산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991년 당시 그 부서의 말단 연구원 5명 중 그녀의 이름도 당당히 연구원으로 올라있었습니다.

일과 가정 사이에서

1990년 양향자는 삼성전자 직원과 결혼했습니다. 당시 고졸 여사원은 결혼하면 퇴사하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그녀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5.

"1990년대 초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의 첫 번째 임신부이기도 했다."

1991년 그녀는 딸을 낳았지만, 출산 전날까지 일했습니다. 당시 연구보조원 여상 고졸 입사 동기가 30명이었는데, 1991년 즈음에는 그녀 외에는 모두 퇴사했습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맡길 곳을 찾지 못해 회사 입구 면회실에 아이를 맡겨놓고 출근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됩니다^5.

"일은 해야겠는데 애 봐줄 사람은 없고 결국 출근해서 애들을 면회실에 맡겨 놓고 일했던 일화는 지금도 유명합니다."

더 높은 꿈을 향해

승진 과정의 역경

E-2(전문대졸 사원 직급) 승진은 쉽게 이루었지만,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후 E-3(대졸 사원 직급) 승진에서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필기 시험은 통과했지만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졌죠.

당시 직장 문화에는 "여자가 아이를 낳았으면 당연히 퇴사하고 집안일에 힘써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면접관들이 이러한 이유로 자신을 승진에서 누락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필기 시험 합격 후, 면접에서 양향자는 과감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녀는 면접관들에게 "전 오늘 여러분께 면접을 보러 온 게 아닙니다. 만약 아이를 낳고 회사를 다닌다고 해서 이렇게 승진 시험에서 누락시키는 회사라면 제가 회사를 떠나겠습니다. 전 이런 회사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면접장을 나왔습니다.

놀랍게도 얼마 뒤 그녀는 승진 통보를 받았고, 1993년 1월 SRAM 설계팀 책임연구원으로 승진했습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

양향자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91년 사내 대학(삼성전자 기술대학 반도체공학과)에 원서를 냈으나 '고졸 여사원에게 학업 지원을 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반려되었습니다.

다음 해 다시 원서를 내자 '여상 출신이 공학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이유로 또 거절당했습니다. 3번째 도전에서도 '심사대상이 아니다'라는 답변을 받았지만, 그녀는 사규에 7년 이상 근속자는 참여 가능하다는 점을 근거로 교육부서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전례가 없으면 자신이 선례를 만들겠다"는 그녀의 의지 덕분에 그녀는 마침내 사내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여성 고졸 연구원 보조로는 유일했던 그녀는 비록 꼴찌로 입학했지만, 졸업할 때는 우수한 성적으로 1995년에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7.

꿈을 이룬 반도체 엔지니어

임원의 자리에 오르다

양향자의 노력과 열정은 계속해서 결실을 맺었습니다. 2007년에는 DRAM설계팀 수석연구원으로 승진했으며, 2008년 2월에는 성균관대학교에서 공학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5.

2011년 플래시설계팀 수석연구원 및 부장을 거쳐 2014년에는 메모리사업부 플래시개발실 상무로 승진했습니다. 그녀는 '삼성전자 최초 상고 출신 여성 임원'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습니다^5.

"삼성전자는 당시 '메모리 설계 전문가로 메모리 제품설계 자동화 추진을 통해 개발기간 단축에 기여'했다는 점을 승진 인사 배경으로 꼽았다."

1995년부터 2016년까지 양향자는 약 42건의 특허를 출원하며 기술적 성과도 크게 남겼습니다.

인연의 힘: 하마다 박사와의 만남

양향자의 커리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연은 바로 일본의 반도체 권위자 하마다 시게타카 박사와의 만남입니다^3.

1988년, 22세에 불과했던 양향자는 회사의 지시로 하마다 박사의 통역과 가이드를 맡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녀의 일본어 실력이 통역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열정과 따뜻한 마음씨는 하마다 박사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향자는 통역원이 아니고 안내원도 아니다. 마치 친 딸을 만난 것 같다"고 하마다 박사는 말했습니다^3.

하마다 박사는 귀국 후 양향자를 일본으로 초청했고, 이후 30년 가까이 서로 편지와 연하장, 카드를 주고받으며 깊은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이 인연은 양향자가 정치에 입문한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정치인으로서의 새로운 도전

반도체 전문가에서 정치인으로

2016년 양향자는 삼성전자를 떠나 정치에 입문했습니다^5. 당시 더불어민주당 영입 인사로 정계에 진출한 그녀는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정책 활동을 펼쳤습니다.

"저는 당적보다, 또 국적이라는 말씀으로, 또 이념을 초월해서, 정당을 초월해서 이 길만큼은 대한민국을 위해서 해야 된다라고 생각을 하고"^9

국회에서 양향자 의원은 반도체 전문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녀는 민주당 출신이지만 국민의힘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초당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2.

"반도체 산업을 살리는 데 여야 구분없이 함께 나서야 한다"^7

양향자 의원은 'K-칩스법' 발의 등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한 다양한 법안을 추진했으며^9, 반도체 산업을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여기고 지속적으로 관련 정책을 제안해왔습니다.

대선 출마와 미래 비전

2025년 4월 13일, 양향자 전 의원은 국민의힘 대선 경선 출마를 선언했습니다^1. 그리고 다음날인 4월 14일, 그녀는 첫 행보로 자신의 커리어가 시작된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을 방문했습니다.

"반도체의 태동이자 반도체인으로서 시작을 했던 이곳은 대한민국과 삼성의 성공의 역사가 깃든 장소"라며 "과학기술을 포함한 경제인들이 국민과 국가를 위해 구국의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고 그녀는 강조했습니다^1.

양향자는 '첨단산업 대통령'을 표방하며, "AI 산업 세계 1위", "100조원 규모 수퍼기업 육성", "과학·기술·AI·수학 인재 100만명 양성" 등 기술 중심의 공약을 내세우고 있습니다^10.

또한 그녀는 여성 모병제 확대, 의료 개혁 등 다양한 분야의 공약을 통해 성별갈등, 이념갈등, 세대갈등 해소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11.

이것만 기억하세요!

양향자의 인생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끈기와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합니다.

  • 어떤 환경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 광주여상 졸업생이 반도체 상무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양향자는 고졸 출신이었지만 사내 대학, 성균관대학교 석사 과정 등 계속해서 공부했습니다.
  • 거절당하더라도 포기하지 마세요. 그녀는 일본어 강좌 수강과 사내 대학 입학에서 수차례 거절당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 일과 가정의 균형은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육아와 직장 생활을 병행하며 결국 성공했습니다.
  • 전문성은 큰 자산입니다. 그녀의 반도체 전문 지식은 정치 무대에서도 큰 강점이 되었습니다.

양향자는 자신의 성공 스토리에 대해 "나처럼 노력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5, 그녀의 삶은 분명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자신의 환경과 조건 때문에 꿈을 포기하려는 이들에게, 그녀의 스토리는 '불가능은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오늘날 양향자는 정치인으로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녀의 핵심 가치는 여전히 변함없습니다. 기술을 통한 국가 발전, 그리고 모두가 공정한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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